아무나 가질수 없는 패션의 마침표 <잇백>
[헤럴드경제 2007-10-19 12:26]
< It Bag >
미국의 현대미술가 바버라 크루거(62)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영상작품을 선보여 큰 화제를 뿌린 바 있다. 존재론적 성찰은 사라지고, 소비와 욕망만 남은 요즘의 세태를 보란 듯 비꼰 것. 그러나 어쩌랴. 안 먹고, 안 타고, 안 읽더라도 ‘사고 싶은 건 반드시 사야 하는 게’ 현대인이거늘. 특히 여성들은 ‘멋지고 돋보이며 세련된 백’을 사는 데 거의 목을 매고 있다. 오죽하면 ‘바로 그 백’을 가리키는 ‘잇 백(It Bag)’이란 말이 20~30대 여성을 넘어, 여학생들 사이에까지 화두가 되겠는가.
여성들이 백에 목을 매니까(요즘은 젊은 남성들까지도), 명품 패션브랜드들은 철마다 새로운 디자인의 백을 내놓기 바쁘다. 의류업체들도 백 디자인에 혈안이 돼 있다. 가방과는 별반 거리가 멀었던 발렌시아가, 입생로랑, 클로에가 ‘잇 백’으로 대박을 치자 크게 자극받은 것.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는 전통의 패션하우스들은 ‘우리도 어떻게든 핸드백으로 한번 떠보자’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같은 도전에 ‘백의 명가(名家)’들이 손을 놓고 있을리는 천부당 만부당한 법.
그러다보니 매 시즌 새로운 디자인의 백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온다. 최근 막을 내린 런던 뉴욕 밀라노 파리컬렉션에서도 새로운 백들이 수천점 이상 선보여졌다. 하지만 철마다 그 많은 디자인의 백들을 사들일 순 없다. 1년에 딱 1개만 산다고 해도 옷장은 백들로 ‘만원사례’ 푯말을 붙여야 할 것이다. 유행을 따라잡으려면 짝퉁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그 경우 1,2년이 지나면 대략 싫증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미 유행의 꼭지점을 친, 흔하디 흔한 백(이들 백은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다)을 구입해 ‘뒷북 치는 걸 보니 감각이 없군!’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도 용서가 안 될터.
여유 많은 사모님들이야 유행과 상관 없는 에르메스(실제로 에르메스샵에는 ‘new arrival’이란 푯말이 없다), 샤넬 등등을 계속 우아하게 들어주시면 된다. 그러나 20~30대 여성들은 상황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 브랜드별로 너무나 다양한 백들이 즐비하게 출시돼 있어 정답, 즉 ‘나만의 잇백’을 고르기란 참으로 험난(?)한 것이다.
트렌드세터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으며 ‘백의 왕좌’에 올랐던 발렌시아가의 모터사이클 백, 클로에의 패딩튼, 입생로랑의 뮤즈, 마크 제이콥스의 스탐을 이어받을 후발주자가 명쾌하게 판명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1,2년 간 빠르게 부상한 고야드며 멀버리를 비롯해 여전히 인기가 많은 루이비통, 샤넬, 마크 제이콥스, 버버리 프로섬, 발렌시아가, 클로에, 토즈, 입생로랑 등이 혼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
40대 이후의 중장년층은 백을 놓고 ‘솔드아웃(매진)’이니 ‘예약ㆍ대기자가 수백명’이니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백은 백일 뿐인데 왜들 그리 아우성이냐는 것. 그러나 ‘한 멋하는’ 젊은이들이 백에 목숨을 거는 건 선진국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저 점잖은 뉴욕타임스까지도 ‘잇 백’ 기사를 내놓고 있으니 말이다. 멋내는 데 있어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 젊은이들은 여기서 한 술 더 뜬다. 파파라치가 찍은 할리우드 스타의 어깨에 걸린 핸드백이 무슨 브랜드인지 곧바로 판별한 후, 0.5초 만에 인터넷에 올리는 게 바로 한국의 막강 네티즌들이다.
문제는 명품업체들이 1년에 춘하, 추동 두차례 새로운 백을 출시하면서 가격을 자꾸자꾸 올린다는 데 있다. 가격이 싸면 허접한 브랜드일 거라고 여기는 일부 소비자들도 잘못이지만, 럭셔리 브랜드들은 새 라인을 출시하며 야금야금 값을 올린다. 때문에 ‘잇 백’들은 적어도 100만~150만원은 주어야 하고, 200만~300만원 짜리가 대종을 이룬다. 매우 부담스런 가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한번 ‘잇’이라고 영원한 ‘잇’이 아니라는 데 오늘날의 심대한 딜레마가 있다.
그렇다면 답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국내 패션계에 ‘백의 달인’으로 통하는 관록의 스타일리스트 정윤기(인트렌드 대표) 씨에게 “올해 말, 아니 내년 초 무슨 백을 사야 ‘한멋 한다’는 소릴 들을까요. 하나 콕 찍어주신다면?”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요즘 같은 디지털시대에 정답이 하나일 순 없죠. 또 지금 뜬다고 1~2년 후까지 확실하게 뜨라는 법이 없어요”라며 즉답을 피한다. 그러면서 지속가능한 백, 당장 예쁘기보다는 장래성 있는 백, 가급적 단순하면서 장식이 거슬리지 않는 백(가죽은 우수(?)해도 장식이 아니올씨다인 백이 많은데 그 경우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며)을 고르라고 충고했다.
이어 “물건이 삐져나올 정도로 작은 가방을 선택하는 여성들을 종종 보는데 갈수록 첨단기기 등을 넣고 다닐 일이 많으니 큰 백을 고르면 실패할 확률이 적다”며 “예전 ‘잇 백’의 특장점을 종합 고찰(?)한 후 새 아이템 중 경쟁력있는 백을 고르라”고 조언했다. 늘 더듬이를 쫑긋 세우고 잡지며 인터넷을 꼼꼼히 살피고, 발품을 팔면서 실물을 비교관찰해야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 남들이 예쁘게 들었다고 덜커덕 따라 했다가 후회하는 이들을 많이 봤다는 충고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비교적 실패하지 않을 브랜드로 토즈의 티 백(앞면에 주머니가 여럿 달린 백)과 패쉬미(가뿐한 헝겊백), 루이비통의 네버풀(좀 흔하긴 하지만), 버버리 프로섬, 고야드 등을 꼽았다.
문제는 백이란 것이 사도 사도, 자꾸 자꾸 사고 싶은 아이템이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비주컴의 손지희 이사는 “단발성 아이템 보다는 소재와 전체 분위기는 유행의 큰 줄기를 따라가되, 브랜드는 스텔라 매가트니라든가 세코야, 멀버리처럼 좀 덜 알려진 브랜드를 고르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참고로 내년 봄여름을 겨냥해 럭셔리 브랜드들은 가죽과 패브릭(헝겊)이 과감하게 매치된 믹스 앤 매치 스타일의 빅백과 광택이 나되 빈티지 느낌을 살린 스타일을 중점적으로 내놓았다. 작은 사이즈도 있지만 대체로 크기가 매우 커졌고 고광택 아이템이 많다.
그렇더라도 유행 보다는 본인 취향및 스타일과의 조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평소 내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을 경우 백전백패한다는 것. 스타일리스트 강윤주 씨는 “최근들어 백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었다. 한 브랜드의 집권(?)시기가 3~4년도 채 되지 않는다”며 “최근 트렌드는 왕진가방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닥터스 백, 색상과 소재가 멋지게 믹스된 스타일, 고광택의 빈티지 백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어디까지나 이 요소는 참고만 해 나만의 잇백을 찾아내라”고 말했다. 즉 첨단 디자인만 쫓다간 스타일이 안 맞아 우스꽝스러울 수 있으므로 스스로의 감성에 귀를 기울이는 게 먼저라는 것.
한편 만약 당신이 좀 변덕스런 편이라면 샤넬, 루이비통, 에르메스의 클래식한 기본라인을 고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상처가 안 나도록 얌전히 잘 들면 압구정, 학동일대에 널려 있는 명품중고매장에서 이들 브랜드의 베이직 백은 절반, 혹은 3분의 1 가격에 되팔 수 있다. 이 ‘빅3’ 외에는 아무리 비싸고 멋진 브랜드라도 중고숍에선 별로 반기질 않는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특히 트렌디한 백은 중고숍에선 거의 사절임을 참고로 알아두자.
▲정윤기(인트렌드 대표)=국내 1세대 스타일리스트로 이제는 패션계 막강파워가 된 그는 일찍이 비비안웨스트우드의 타탄 백을 유행시킨 인물. 드라마‘내 남자의 여자’의 김희애에게 프라다의 이색‘칼국수 백’을 들게 하는 등 스타일링을 맡았다. 정 대표는 장바구니형 빅백을 좋아한다. 단 엣지가 있는 걸 고른다. 버버리 프로섬의 빅백과 루이비통의 네버풀을 즐겨 들고 다닌다. 최근엔 고야드 백에 매료돼 있다.
▲오제형(프레싱크 대표)=연예인 출신이어서 연예계와 패션계를 매치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구치, 루이비통, 발리 등 브랜드를 가리지 않는데 2년 전 구입한 발렌시아가의 모터사이클 백은 늘 만족스럽게 들고 다닌다. 요즘에는 만다리나덕의 실버 빅백(38만원)을 애용한다. 클로에, 마크 제이콥스의 백도 좋아하지만 무거운 게 흠이라고. 브랜드만 추종하기보다 기능성 있고, 즐겁게 들 수 있는 백을 고르라고 조언했다.
▲강윤주(2021스타일링 실장)=드라마 속 조인성의 세련된 스타일을 전담해 실력을 인정받았다. 백은 의외로 클래식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편. 가장 좋아하는 백은 샤넬 2.55 백. 시에나 밀러, 미샤 버튼 등이 사랑하는 백으로, 적금을 들어서라도 장만하겠다고 벼르는 중. 입생로랑의 뮤즈 백, 샤넬의 코코카바스 백도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었다고. 강추 아이템은 캐주얼과 정장에 두루 잘 어울리는 마크 제이콥스의 스톰 백.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그래픽=이은경